그는 전지전능한 지성을 갖추었으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 - 신의 탑 -
"컴퓨터는 어마어마한 연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용 청소기같은 하찮은 하드웨어말고 기상용으로 쓰이는 슈퍼컴퓨터나 이제 곧 나올 양자프로세스의 계산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죠. 이런 컴퓨터를 암산으로 따라잡겠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인간의 두뇌만이 갖는 거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연결입니다. 인간의 뉴런은 아주 간단한 착상에도 수백 개 이상이 연쇄되어 작동합니다. 인간의 뉴런은 아주 놀랍도록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마치 우주 같습니다. 인간은 바로 이런 전뇌적인 사고, 연결, 유추 적용에서 컴퓨터를 압도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올 인공지능은 유추해석을 하는 식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그의 말을 비웃었다. 그 이유는 그의 말이 우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현존하는 최고의 체스엔진 개리피쉬와 릴파제로와의 경기를 앞두고 이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스 엔진 피쉬와 제로는 이미 인간과의 경기가 무의미하기때문에(인간과 경기 승률 80%에 육박하고 있었다. 나머지 20%는 무승부 즉 무패였다.)엔진들끼리 체스를 두는 대회에서 항상 1,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체스에서만큼은 인간을 압도하는 엔진들 앞에서 말하는 그의 호언장담은 기자들의 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체스챔피언이었던 카스파로프가 딥블루에게 무너진 지 어언 20년 째 더 이상 체스엔진과 인간이 체스를 맞붙을 수는 없다고 기자들은 생각했다.
첫 경기 날
그는 오늘 릴파제로와 경기를 하게되었다. 별로 떨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경기장에 나타났고 경기는 시작되었다. 릴파제로는 백, 그는 흑이었다. 릴파제로는 당연하다는 듯 중앙에 폰을 움직였다. 그는 노타임으로 좌측의 폰을 한 칸 움직였다. 릴파제로는 또다시 중앙의 폰을 두 칸 전진시켰고, 그는 폰을 타격할 수 있는 자리로 나이트를 움직였다. 이렇게 초반은 서로 디밸롭develop을 계속해나갔다.
슈퍼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무렵 체스 실력은 레이팅rating 1700~1800 정도였다. 준프로급이긴 하지만, 프로에게는 택도 없는 수준이었고 특히 최정상 프로들은 슈퍼컴퓨터들의 기물을 실컷 밟으며 승리감을 만끽하기도 했다. 카스파로프는 한 때 이벤트로 수십개의 컴퓨터와 동시에 경기를 펼쳤고 단 한 판도 비기거나 지지 않고 모든 슈퍼컴퓨터들을 이겼다. 체스의 전설 바비 피셔는 green 슈퍼 컴퓨터와 이벤트 경기에서 슈퍼컴퓨터를 농락하면서 승리하는 인간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감히 체스로 인간에게 덤빌 경쟁자는 없었고 컴퓨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의 성장은 눈부셨다. 슈퍼컴퓨터는 놀랍게 성장했지만, 전략에 대한 이해와 패턴인지에서 최정상 프로들의 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최정상 프로들은 'over the horizon'전략으로 가볍게 이기곤 했다. 'over the horizon'전략이란, 지금 당장보다 더 멀리 수평선 너머까지 바라보고 두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최정상 프로는 간혹 나이트나 비숍으로 상대의 폰을 잡는다. 당연히 지금 당장만 보면 그 나이트나 비숍은 멍청한 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으로 옳다구나 비숍과 나이트를 낚아채고 몇 수 두다보면, 8수 뒤에는 상대편의 룩과 퀸이 최정상 프로의 나이트에게 동시에 공격받는 상황에 처한다. 퀸이나 룩 중 하나를 포기해야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이런 공격이 슈퍼컴퓨터들에게 통했기때문에 많은 최정상 프로들은 그들을 무찌르며 많은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슈퍼컴퓨터가 오히려 더 멀리 내다보면서 최정상 프로들을 낚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현실인데도 그는 프로들 사이에서 '자살 행위'로 통한다는 슈퍼컴퓨터, 체스 엔진과의 정면대결을 유도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디밸롭하고 후에 싸우겠다는 건 흑에게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어서 프로들은 인간사이에서도 많이 쓰는 전략은 아니었다. 근데 그는 지금 세계 최강의 체스엔진을 앞에 두고 그런 작전을 준비해왔다. 릴파 제로는 공격을 전혀 서두르지 않고 폰을 서서히 전진시키며 판의 전반을 장악했다. 흑이 움직일 공간이 갈수록 좁아져 수세에 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장고에 빠져들었다. 그 후 그가 한 수를 두는 순간 많은 기자들이 탄식했다. 수세에 몰려서 흑이 어쩔 수 없이 두는 한 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백의 포위망을 억지로 뚫고자 발버둥치는 패자의 한 수였다. 마치 사냥꾼의 올가미에 잡힌 숫사슴을 보는 느낌이었다. 릴파제로는 노타임으로 그 수에 응대했다. 이제 종내는 그는 졌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7수 뒤 많은 기자들은 믿기지 않은 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 현존하는 최강의 체스엔진을 이기는 괴물같은 인간을 보고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경기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자신의 비숍을 진영의 중앙에서 외곽으로 뻗자마자 릴파제로는 resign(졌다)을 선언했다. 아무리 최선의 수를 두어봤자 35수 뒤에 체크메이트였기 때문이다. 35수면 아직 많은 수가 남았지만, 릴파 제로는 이미 경기판을 슈퍼 컴퓨터의 계산으로 읽고있었다. 슈퍼컴퓨터의 계산으로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격차였던 것이다. 흑을 잡고 최강의 체스엔진을 격파할 수 있는 사람, 기자들은 완전히 놀라움과 흥분에 빠져들어 소리질렀다!
"체스나 바둑 같은 두뇌스포츠의 최고 자리는 이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컴퓨터에게로 넘겨주어야한다는 중론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잘못된 관념을 깨부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경기를 위해서 약 6개월의 시간동안 슈퍼컴퓨터들의 많은 수들을 직접 분석했으며 동시에 이위공문대, 손자병법같은 전략서를 파고들었습니다. 제가 중반의 수를 두었던 것도 거기에서 착안된 것이었습니다. 이정은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선을 가지고 상대방을 끌어오도록 해야한다. 이것이 손자병법의 요체이다" 제가 그 수를 둘 때에 릴파제로가 구사할 대응수는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저는 좀 더 최선의 타이밍 때에 제게 유리한 구도로 상대방을 격파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각각의 대응법은 이미 제 머릿속에 있었고 파해법도 가지고 있었고 저는 최선의 한 수를 두었습니다. 그것이 제 승부수였습니다. 이 모든 맞물림 속에서 저는 제 기물들을 좀 더 완전하게 두고자 했습니다. 체스엔진끼리 둘 때에도 서로 승패가 갈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완벽해 보이는 체스엔진이라도 충분히 파고들 약점이 있다는 뜻이죠. 체스엔진보다 좀 더 완벽하게만 둘 수 있다면 충분히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그 점을 생각했고 결국 이길 수 있었습니다. 체스엔진이나 인공지능을 보고 많은 걱정을 하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인간이 할 일이 없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엔진이나 인공지능은 인간의 조력자입니다. 이 번에 저도 체스엔진을 이기고자 체스엔진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인간도 이렇게 잘 이용해서 빠르게 배워간다면, 충분히 연결적인, 전뇌적인 사고로 체스엔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첫 경기가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기자가 바로 물었다.
"현 세계 챔피언들도 못한 일을 해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현 세계챔피언들이 모르는 것을 저는 압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위공문대, 손자병법 같은 것들이죠.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체스판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저는 챔피언들과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체스판을 보고 이해합니다. 아까 말한 전략서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혹은 성서의 문학적 구절까지 참고할 때도 있습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이런 식으로 체스판을 보고 이해합니다. 이런 다차원적인 복합성이 이기는 원동력이 된 거죠.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단순 계산으로는 슈퍼컴퓨터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직관, 도약, 유추해석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릴파제로를 또 다시 5판, 개리피쉬를 6판 이기며 예정된 12판을 모두 이기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체스는 이미 충분히 이겼고 증명했습니다. 이제는 바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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