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

장녹수 (연산군일기)

영웅*^%&$ 2018. 5. 25. 11:07
728x90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 가노()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으로 봉했다.-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가 거만()이었다. 부고()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냈고, 금은주옥()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ㆍ전답ㆍ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임술ㆍ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한 짓이 많으므로 소혜왕후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외부에까지 왕왕 듣고 서로 보여 귓속말을 하며 그윽이 근심하게 되므로, 소혜왕후가 또다시 몰래 대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간절히 간하게 하니, 왕이 더욱 분해했다. 그리하여 항상 조정에 구애되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발로할 수 없었다.- [연산군일기]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연산 때에 큰 예법이 이미 무너져 내외가 구별이 없으므로 청탁이 공공연히 행하여져 궁문이 저자와 같았습니다. 전비()와 장녹수의 무리가 안에서 고혹()하고 내수사의 붙이들이 밖에서 횡포를 부리며, 안팎으로 결탁하여 간계를 부리고 교묘한 짓 하기를 못할 것이 없이 하며, 심지어 사소한 송사에 이르기까지 연줄을 타 해당 관사를 거치지 않고 궁중에서 결단하면서 반드시 ‘어결(: 왕의 결정)’이라 하므로, 감히 누가 무어라고 하지 못하여 하늘이 노하고 사람이 분히 여겨 마침내 패란()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니, 이는 신 등이 목도한 바로서 전하께서 경계 삼으셔야 할 바입니다.- [중종실록] 1507년(중종 2) 7월 2일

연산군은 정말 끔찍한 폭군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광해를 재조명하려는 역사연구도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연산군은 정당화하려야 할 수 없는 심각한 폭군이었다 하지만 연산군도 왕 초반에는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성종처럼 훌륭한 왕이 될만한 자질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너무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근묵자흑 유유자적 장녹수같은 사람들이 옆에 끼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최악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서 자신을 점검해보자 


728x90

'우리나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는 왜 종속되어왔을까?   (0) 2018.11.09
단발령   (0) 2018.09.27
우리나라의 현대 인권 역사 민주화 운동   (0) 2018.05.21
시인 윤동주   (0) 2018.01.20
우리나라의 가장 안타까운 역사   (0) 2018.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