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이란 무엇일까요?
부처가 열반에 이른 후 그의 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부처가 그 가르침을 가장 핵심적인 언어로 아주 짧고 간명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정말 내용이 짧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가장 본질적인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말 그대로 반야심경에 관한 주관적인 통찰입니다. 이는 주관적인 이해이며 저는 주제 넘게도 심경 뿐만 아니라 불교에 관해서도 각자가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무엇인가 객관적인 이해가 있어 모두가 똑같이 생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의 뜻 :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행함과 의식도 그러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게 반야심경과 불교의 가장 중요한 전제 같습니다. 부처는 이 자체를 논증하지 않고 말 그대로 본질을 통찰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물질들이 사실은 공과 같다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
간략하지만, 유치한 예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당신에게 1000조가 넘는 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1000조의 돈을 받는 바로 1초 뒤에 당신은 사망합니다. 아주 깔끔하게 당신은 어떠한 존재형태로도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 때 당신에게 1000조의 돈이 의미가 있나요 ?
아무리 많은 돈도 어떠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공불이색" 이 간단한 진리를 혹은 통찰을 우리의 죽음 혹은 저 광활한 우주에서 아주 가볍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설득력 있는 전제인 동시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혹은 반야심경의 통찰을 비판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학 특히 양자역학을 아주 깊게 이해하였을 때 이와 똑같은 통찰에 다다를 수 있지만, 이는 핵심 논지를 벗어나니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일단 가벼운 비판을 차치하고서, 우리의 경험과 혹은 본질적인 통찰로 이 전제가 와닿지 않은가 감히 생각해봅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불교의 겉모습 적인 가르침과 지혜가 모두 여기에 하나로 합쳐지듯이 닿을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 각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 자체의 뜻 :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지혜)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 NIRVANA에 들어갑니다
물질이 사실 본질적으로 공이라는 것을 안다면, 얻을 것이 실질적으로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마음은 헛된 것을 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헛된 것을 좇지 않을 수 있으며 감정과 여타 모든 것들이 사실은 공이라는 것을 안다면, (단순히 부정한다는 뜻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있음을 알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혹은 결국엔 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걸림과 두려움이 없어 헛된 생각을 떠나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아주 간략하게 보았을 때, 불교에서는 사람이 불행과 고통에 이르는 원인을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미친 생각, 헛된 생각, 욕망 등으로 보고 있습니다(일부러 조금 더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돈에 미친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돈에 미친 이 사람은 사실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원하게 됩니다. 더 많은 돈, 돈 돈돈 돈돈돈돈돈, 결과적으로 이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얻게된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는 이 사람 마음에 만족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향한 갈망만을 줄 뿐입니다. 구멍이 뚫린 항아리 위로 물을 계속해서 붓는 식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수록 괴롭습니다. 이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얻지 못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돈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기에 죽을만큼 괴롭습니다.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돈을 많이 얻든, 돈을 많이 얻지 못하든, 결국 괴롭기만 합니다. 이 사람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원인을 다루는 데서 시작합니다. 원인이 돈에 대한 끝도 없는 욕심이었으니 이를 조정해야한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해볼법직 합니다. 욕심을 버리면 될까요? 안분지족하면 될까요? 중용이 해답일까요? 물론 이 역시도 아주 적정한 해답입니다.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역시도 아주 적정한 답이며, 또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일상에서 느끼는 감사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일상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서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불교는 조금 더 급진적인 해답을 내놓습니다. 색불이공, 색즉시공, 공불이색, 공즉시색
실제로는 그 물질 자체가 공하다는 것을 깨닫고 통찰하라는 것입니다. 이 통찰을 통해 자연히 다음 단계로 이르는 것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의 본질적인 이해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 불교의 핵심을 통찰하였습니다. 다만,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이는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혹시나 반야심경에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직접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내용이 정말 아주 짧습니다. 또한 불교의 핵심을 보기에도 이만한 내용(반야바라밀다심경)은 없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제발 어떤 해설서만 읽지 마세요 ;; 본인께서 직접 보시고 직접 이해해보거나 통찰해보시길 아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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