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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를 나오면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어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답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며,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곳을 여행다니고 싶었다. 이리저리 여행다니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것은 나의 성향과 잘 맞았다. 나는 그 다음 날 짐을 채겨 파리로 떠났다.
파리는 한가한 도시였다. 그 한없이 가벼운 공기가 나의 마음에 들어와 함께 호흡했다. 예전에 내가 살았던 도시는 너무 복잡한 도시였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무엇보다 일이 많았다. 나는 그 복잡성에 밀려서 수많은 시간들을 정신 없이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파리는 그러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애초에 일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전에 나는 주말에 누리는 잠깐의 여유에도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만큼 바쁘게 지냈고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계속해서 밀려나기만 했다. 나 자신이 매 시간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회사에서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서류보다 내 손 위에 살포시 얹어지는 햇살 한 조각이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는 듯했다. 덕분에 나 역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공간의 변화만으로 마음의 변화까지 얻게 되었다.
여유는 기쁨이었다. 나는 파리 구석진 카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으며 몇 시간씩 보내곤 했다. 틀을 깨고 이리 저리 다니는 것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내 생활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러한 생활에 엄청나게 만족했다. 나의 여유, 나의 갈망, 나의 시간이 온전히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때에 우연히 그를 보게 되었다는 점이 지금 되돌아보면 참 우습다. 운명의 여신은 어디서 주사위를 던질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여느 때처럼 한 카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을 때, 그는 한 여자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다. 언제나 여자를 정복하던 그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게 뭔가 생소한 느낌이 들어 현실이 아닌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 때 마음의 여유가 넘치는 상태였다.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에게 인사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기쁜 마음이었다. 나는 책갈피를 책에 꽂고 계산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에는 무슨 일이야?” 내가 그에게 물었다.(아마도 이 때 나는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어?” 그답지 않게 살짝 당황한 거 같았다. 그의 눈 속에는 과거에 기억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 자네로군. 여기 내 옆에 약혼자 헬레나 푸르망이네.” 그가 다시 답했다.
헬레나 푸르망? 그에게 약혼자가 생겼단 말인가? 그녀는 굉장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여자였다. 파란 호수 같은 눈동자에 (너무 진부한 표현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고슬고슬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자신의 앞쪽으로 곱게 모은 두 손이 대단히 고귀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약혼한거야? 정말 축하하네”
*이 이야기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쓰인 플롯은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역사적 진실을 이해하고 싶으신 분은 제 2차세계대전 홀로코스트에 관해서 직접 자료를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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