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라면

영웅*^%&$ 2021. 4. 12.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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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라면을 끓여먹다가 시간도 남고 해서 나만의 추억에 잠겨보았다. 예전에 외국에 몇 달 정도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그 때에는 입맛도 입맛이었지만 갔던 곳이 썩 음식을 잘하는 곳은 아니라서 고생을 조금 했다. (맨 처음 갔을 때는 거의 먹을 수 없는 정도였다. 그나마 두 번째 갔었을 때는 음식 걱정은 안 했다.) '뭐든지 주는 대로 감사하면서 쳐먹는 타입'인 나이지만 거의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주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라면을 먹곤 했었다.

한국에서는 고추장이나 깻잎 혹은 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만큼 흔한 음식이고 식당에 가서도 거의 증정식으로 나누어주는 음식이다. (한국)집에 고추장, 깻잎, 김 등이 하나라도 없는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흔하디 흔한 식품이 외국에서 차지하고있던 위상은 달랐다. (물론, 한국입맛에 맞추어진 우리에게 가장 특별한 음식이었을 테지만) 기름지고 수준 떨어진 음식을 먹다가 버린 입맛을 되돌려주는데는 라면 한 젓가락이면 충분했다. 매운맛이 부족할 때는 라면에다가 고추장도 넣어서 먹기도 했다. 고추장에는 매운 힘이 있다. 수많은 외세침입을 겪었던 우리의 선조들은 어쩌면 고기보다는 고추장같이 매운맛의 힘으로 일어나 싸웠을지도 모른다. 수 천년 혹은 수백 년 전에 고기는 너무나 귀한 음식이었기에, 고추를 먹을 때 그 알싸하고 매운 맛을 기억하면서 우리 선조는 적들과 싸웠으리라. 적들에게도 이 매운 맛을 먹이고 말겠다고 다짐했으리라. (역사적으로 확정된 얘기는 아니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치지는 말자)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라면을 그리 자주 먹지는 않지만 (한 달에 2번 정도?) 라면을 먹을 때마다 영양소로만(탄단지 뭐 그런 거) 알 수 없는 기억과 매운 힘을 느끼곤 한다. 훈련소 행군을 마치고 난 뒤에 먹었던 참깨라면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군대에서 종종 근무를 서다가 중간에 라면을 먹었을 때 그 맛도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맛있었다. 예전에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거나 여행을 갔을 때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라면을 많이 먹었다. 생각해보면, 라면은 줄곧 내 인생 곳곳에 함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면이 가까웠을 때는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 평소(主) 생활터전과 꽤 거리가 있을 때였다. 내 평소 생활터전과 멀어지면 라면이 가까워진다? 고향과 멀어지면 라면이 가까워진다? 고향과 멀어지면 고추장이 가까워진다? 고향과 멀어지면 고향 음식이 가까워진다? 고향과 멀어지면 고향 사람이 가까워진다? 고향과 멀어지면 고향이 가까워진다? 점점 말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말은 아닌 거 같다. 막상 고향에 살 때는 혹은 고국에 살 때는 불편한 점에 포커싱을 둘 때가 많으니까(사실 우리 대부분이 그러지 않나?). 그런데 고향을 떠나,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면 예전에 있었던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벗은 일상도 뭔가 아름답게 스스로 미화하고 그러지 않았던가? 이건 파리 혹은 뉴욕에 며칠만 머무르면서 그 때를(그렇게 짧은 여행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고 회상하는 우리의 기억 메커니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지도 모르겠다. 고향은 고국을 가장 멀리 둘 때 오히려 가장 가까워진다. 우리 안에는 노스탤지어가 있으니까.

아차 물 끓는다 라면이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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