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김치가 썩는 일이 발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일이다.
김치는 보통 반 년 이상을 숙성시킬 수 있다. (온도, 환경에 따라 다르다)
김치 냉장고에 넣어놓은 김치가 썩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어떻게 김치 냉장고에 넣어놓은 김치가 썩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러나 바로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만든 두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의 할무니와 엄마이다.
이 두 분이 크로스하는 순간 홍해가 갈라지고 십자가가 거꾸로 선다. 말도 안 되는 모든 설화와 스토리텔링이 실화가 되고 상하는 반전한다. 이성은 고꾸라지고 믿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 두 분의 극단적 비효율성은 끝내 김치 냉장고 안에 있는 김치마저도 감동 시켜 썩게 만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기적이다. 우리 집에서 오직 이 두 분만이 기적을 믿는다.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합리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이 두 분에게는 합리성보다 믿음이 우선이다. 그들의 모든 삶과 마음은 믿음 위에 세워진다.
이 두분이 김치를 향해 미소짓는순간, 수 년동안 김치냉장고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잊혀지던 김치는 얼굴이 빨개져서 스스로 퇴화시키고 만다. 숙성 위에 숙성이 더해지고 그 무한한 숙성의 굴레 속에서 김치는 자신의 존재마저도 잊고 만다.
나는 효율성의 극한을 달린다. 모든 것은 어떠한 목적에 맞추어진다. 지혜와 합리성이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합리성을 거스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도 믿지 않는다. 진리는 논리에 기반한다 적어도 직관에 합당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치를 담가먹는 사람은 김치를 사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김치를 사먹는 사람도 김치를 담가먹는 수고로움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김치를 담가먹는 수고는 비효율의 극치이다. 예전에는 모두가 담가먹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시켜먹기 때문이다. 조금 일반화시킨 것이긴 하지만, 집에서 밥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주일에 2~3번이야 자기 손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밖에서 사먹는 음식에도) 건강한 음식이 충분히 많은 이러한 시점에서 굳이 자신의 손과 돈을 수고롭게 하여 자신의 시간을 잠깐의 식욕으로 환산한단 말인가? 효율적인 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음식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같은 것이 아닌가? 그냥 주는 대로 처먹는 나 같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고로움이다. 음식은 그냥 감사하면서 먹으면 다 같은 것이지 않나? 배고플 때 먹으면 무슨 음식이든 다 맛있지 않은가?
그러나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나의 할무니와 엄마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음식은 신성한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대충 먹을 수 있냐고 한다. 너가 예전에 가난하던 때를 아냐고 물어본다. 나는 비록 가난한 때는 모르지만, 배고픈 때는 안다. 군대에 있을 때, 훈련소에 있을 때 무척이나 나는 배고팠었다. 결핍이 무엇인지는 족히 배웠다.
효율성과 비효율성의 거대한 격차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하여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썩은 김치를 보면서 물어보았다.
나는 당신(할무니와 엄마)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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