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일기

정유정 작가님의 <완전한 행복>을 읽고 (스포 있음 o)

영웅*^%&$ 2021. 6. 22.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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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이 책을 펴서 읽을 때에는 30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초반부의 분위기는 너무 다크했고, 서술 방식의 지루한 전개가 반복되었다. 초반에는 정유정 작가 특유의 악에 대한 이야기인지, 다른 내용의 이야기인지 방향을 잡기가 힘들었다.

100쪽 까지 읽었을 때에는, 솔직히 이대로 책을 덮어야하나 고민했다. 지지부진한 가족 얘기라면, 도무지 읽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작가 정유정 님의 책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읽어보자'라고 생각했다. p124에서 노아가 죽었을 때 눈이 번쩍 떠지며 나의 머릿속 분석 장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p132쪽까지 읽었을 때 모든 내용을 추리할 수 있었다. (신께 맹세한다) 신유나가 범인이라는 것, 원색은 뻔하다는 것, 노아를 신유나가 죽였고 노아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이 있다는 것, 그 외 구체적인 사항은 아직 몰랐지만, 대강의 추리가 단박에 떠올랐다. p132에서 눈치챈 건 좋았는데 작가의 의도보다도 약간 빠르게 눈치를 채다보니 그 후에 남은 200page 정도가 살짝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 작가의 빨려들어가는 서술 덕분에 쭈루룩 읽을 수 있었다. 민영의 편지부분(대략 p180)을 읽으면서 내 추리가 옳다는 것과 작가가 패를 다 보여주는 이유는 뭘까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이 소설에서는 1부만에 가지고 있는 패를 전부 보여준다)

독자들이 1부 안에서 이미 다 깨달은 내용을 2부, 3부까지 수백 페이지에 걸쳐서 얘기하다보니 충분히 지지부지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직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파일을 열자마자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억센 주먹에 명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진 속에 그와 노아가 등을 지고 누워 있었다. 노아는 펭수를 끌어안고 왼쪽으로, 그는 강낭콩처럼 몸을 말고 오른쪽으로'(p285) -이런 식의 정유정 작가님 특유의 서술이 곳곳에 있어서 책을 끝까지 밀고나갈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정유정 작가님 서술에 빨려들어가면서 읽어나가다가 p320에 나오는 신재인의 결심을 듣자마자 '멍청하네'라고 써두었다. 설득력이 부족한 서술은 아니었지만(후반부에 더 명확해진다) 신재인의 선택에 대해서는 멍청하다는 말밖에 덧붙일 게 없었다.

p354에는 '조르바와 유나는 무엇이 다른가? 강함과 약함의 차이인가?'라고 적었다.

p398, p450을 읽으면서 은호라는 놈 역시 대응이 참 미숙하다고 느꼈다. (다른 말로는 은호 재인 둘 다 ㅈ 됐구나 정도) 그리고 이후의 서술 역시 그 생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설득력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유나는 경찰에 잡히기까지(결국 잡히지도 않지만) 거의 무쌍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주변에 모든 이들을 자기 맘대로 가지고 놀면서 폭력을 휘두른다. 주변인들의 대응은 거의 5살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당연히 작가가 의도한 서술 방식이겠으나, 정유정 작가의 팬으로써 나중에 천재 싸이코랑 고기능 소시오패스가 진짜 서로 미친 악마적 지능으로 맞짱 뜨는 걸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변인들의 대응은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숙하니까. 유나의 무쌍능력에 아무것도 못하고 쳐맞기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지우기 힘들었다.

'마치 리셋 단추를 누른 것 같았다. 집 전체가 태평한 시절로 돌아간 모양새였다. 흠결 없이 평온한 풍경이었다. '행복'이라는 신화를 이룬 한 가족의 불가침 왕국으로 보였다. 이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노라, 선언하는 듯.'(p235)

'자신은 유나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 역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꽃 노래를 부르는 아이의 망령이, 죽음의 위기에 도달한 이 순간까지 자신의 사지를 결박하고 있다는 점에서.'(p503)

'칼끝처럼 날카로운 얼음물이 온몸으로 짓쳐 들었다. 땀구멍까지 한숨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땅콩만 하게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선 겁먹은 짐승이 앞뒤 없이 들뛰고 있었다.'(p513)

정유정 작가는 미친 작가이다.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날 때부터 대단한 작가였으나 그새 한 뼘 더 성장해왔다. 중간중간에 기존의 방식과 비슷한 서술은 분명히 있었지만, 정유정 작가는 위의 문장들을 통해서 자신의 성장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삶의 어느 한 순간에 참된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홀로 어두운 숲을 헤매고 있었다. -단테

소설의 결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였고 이와 비슷한 많은 작품이 택한 방식이기도 했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종의 기원>의 결말도 정확히 예상했다. 그리고 나는 그 결말이 좋았다.) 나는 오히려 끝까지 읽으면서 정유정 작가님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내게 유나는 나르시시스트로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이코패스이자 덜 자란 어른이로만 느껴졌다. 유나에게 오히려 필요한 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는 - 그리하여 삶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작가의 말과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을 죽이기까지 이를 때, 자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죽이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많은 경우 자신을 혐오하기에 혹은 지켜야 하는 존재가 소중하기에 남을 죽이기까지 이른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자기존중이 너무 적은 편이다. 자기존중은 없으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기만 하고 자기에 대한 사랑은 없으면서 남에 대한 경쟁에만 매달린다. 그리하여 남도 살고 나도 사는 번영은 없고 내가 죽겠으니 너도 우스울 뿐이라는 잘못된 경쟁 마인드만 만연해 있다. 내가 아직 나이가 어려 10,20대 사람들만 보아서 일 수도 있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남이 정말로 노력해서 성공했을 때 그에 대해서 진심을 다해서 박수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박수소리가 아직 좀 작게 들린다면, 남을 짓밟아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의 잘못된 가르침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이다. 유나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이러한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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