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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독교

바트 어만의 헛된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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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바트어만을 비난하고자 쓴 글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글 혹은 생각을 심층적으로 조망해보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바트 어만은 무디 성서학교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무디 성서 학교에 있을 때 그는 기독교 신자였고 성서에 쓰인 모든 문장과 사실이 완벽히 팩트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이것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믿음을 버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궁극적으로' 무디 학교의 관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완벽히 사실이거나 아니면 그저 구라에 불과하다' 라는 관점입니다. 이는 성서의 장르적 특성, 시대적 상황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아니 최소 2천 년 전에 쓰인 고전 문학이 어떻게 현대 체계에 걸맞은 사실주의 기법으로 서술되기를 바랄 수 있는 건가요? 이는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도 안 되는 '기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문학입니다. 대다수 내용들은 구전과 이야기에 기대어 서술되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장르적 특성,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서에는 역사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복음과 부활을 전파함으로써 순교당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 당시에 전해지는 독립적인 출처를 가진 기록들, 고고학, 시대적인 문맥 등을 고려하여 우리는 정말 사실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는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이며 심지어 바트어만 자신의 학자적인 양심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무디 때 배웠던 무지성 기준을 가져다가 "완벽한 사실이거나 아니면 구라야 오 근데 성서를 보니 완벽한 사실은 아니네? 그래 그러면 갖다버려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몰지각한 이해 방식일 수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점은 많은 개교회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든 비신자든 성서에서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거나 고고학, 역사, 과학 등이랑 대립되는 부분을 찾으면 즉시 기독교 믿음에 회의를 느끼거나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1600년도 전에 서술한 현상 그대로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증거 혹은 근거도 전혀 아닌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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