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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렸다. 달리는 거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해가 적막하게 저물어 갈 때도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갈비뼈 사이를 어루만질 때도 나는 그저 조용히 달렸다. 달리는 것은 내게 반항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었다. 나의 말이 금지당한 곳에서 포효하는 나만의 반항어語였다.
황금 같은 20대의 어느 날, 나는 한국 남자라면 당연히 간다는 군대에 갔다. 훈련소는 일과를 체조와 달리기로 시작한다. 약 3km 정도 되는 거리를 달린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는 자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군수체조를 했다. 병장 때 되면 눈 감고 반수면 상태로 하는 그 체조가 끝나면, 군화를 신고 연병장을 달렸다. 언제가 되어야 끝이 날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되었다.
달리고 일과를 채우고 체력단련을 하고 훈련을 하고 근무를 선다. 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달리고 일과를 채우고 체력단련을 하고 훈련을 하고 근무를 선다. 그래서 나는 달렸다. 개인정비 시간, 군인이라면 누구나 30분 아니 딱 5분 만이라도 쉬고 싶어하는 그 시간에 나는 나 혼자 매일 5km달리기를 완수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팔굽혀펴기 100개. 그렇게라도 달리지 않고는 내 정신이 버티질 못할 것 같았다.
이등병에서 일병이 되는 어느 날, 나는 어떤 훈련의 선발대로 차출되어 먼저 해당 지역으로 보내졌다. 해당 지역에서 구르고 살이 찢기고 쓸리고 까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맞선임은 내가 하극상을 했다며 대대에 보고하였다. 그는 저번 훈련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다시는 이런 훈련에 참여할 일이 없었다. 그는 심심하다는 이유로 내가 하극상을 했다고 고발하였다. 그의 다리 부상에 책임이 있던 중대장은 그의 고발을 사실 확인 없이 받아들였고 선발대까지 가서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변명 한 줄 따위 허락되지 않았다. 하극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표가 붙은 채 다른 부대에서 새롭게 근무를 시작하는 것은 아주 산뜻한 경험이었다. 어떤 날에는 내게 단 1시간의 잠도 허락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심지어 그런 날이 일주일 가량 지속되는 나날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달렸다. 날개가 있었다면 날아서 어딘가로 떠나갔겠지만, 내게는 오직 두 다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달렸다. 쏟아지는 울분과 눈물을 삼키어 눈에는 눈물 한 줄 흐르지 않았다. 오직 내 두 다리만이 아무 소리 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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